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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 전두환 日海 全斗煥Chun DooHwan
1931 ~ 2021
한국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작가약력
작가 소개
1931년 경남 합천 출생, 본관은 완산(完山), 아호는 일해(日海)이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1958년 이규동 장군의 딸 이순자씨와 결혼했으며,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고 1965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69년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내고, 70년 제9사단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파견된 뒤 돌아와 71년 제1공수특전단장이 되었다. 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78년 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 10·26사태 이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대통령 암살사건의 수사책임을 맡고 수사하던 중 12·12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80년 4월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섰다.
80년 5·17계엄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을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 6월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에 취임한 데 이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81년 1월 민주정의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해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이래 철권정치로 일관, 언론통폐합 등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제반조치를 취하고 고문·구속·투옥 등으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 친·인척의 권력형 대형부정비리를 속출시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87년 4·13 호헌성명으로 권력연장을 꾀했으나 전국민이 이에 반발, 전국 각지에서 으로 불리는 민주화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87년 6월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88년 2월 25일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했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문제가 논란이 되어 88년 11월 대국민 사과 후 백담사에 은둔하였다가 2년 1개월 만인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95년 구속 수감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으며, 98년 복권되었다.
2003년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533억 원이 추징되었고, 2013년 8월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팀이 출범한 후 자금 주적 등을 통해 확보된 부동산ㆍ금융자산ㆍ미술품 등이 공매처분 등의 방식으로 422억 원이 환수 처리되어 2014년 4월 현재 전체 추징금 2205억 원 중 955억 원이 집행되었다.
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69년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내고, 70년 제9사단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파견된 뒤 돌아와 71년 제1공수특전단장이 되었다. 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78년 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 10·26사태 이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대통령 암살사건의 수사책임을 맡고 수사하던 중 12·12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80년 4월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섰다.
80년 5·17계엄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을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 6월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에 취임한 데 이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81년 1월 민주정의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해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이래 철권정치로 일관, 언론통폐합 등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제반조치를 취하고 고문·구속·투옥 등으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 친·인척의 권력형 대형부정비리를 속출시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87년 4·13 호헌성명으로 권력연장을 꾀했으나 전국민이 이에 반발, 전국 각지에서 으로 불리는 민주화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87년 6월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88년 2월 25일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했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문제가 논란이 되어 88년 11월 대국민 사과 후 백담사에 은둔하였다가 2년 1개월 만인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95년 구속 수감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으며, 98년 복권되었다.
2003년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533억 원이 추징되었고, 2013년 8월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팀이 출범한 후 자금 주적 등을 통해 확보된 부동산ㆍ금융자산ㆍ미술품 등이 공매처분 등의 방식으로 422억 원이 환수 처리되어 2014년 4월 현재 전체 추징금 2205억 원 중 955억 원이 집행되었다.
출처/한국근현대사사전, 시사상식사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