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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 장면 雲石 張勉Jang Myeon
1899 ~ 1966
한국
작가약력
- 1899∼1966. 정치가.
작가 소개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출생지는 서울, 출신지는 인천. 일제강점기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장기빈(張箕彬)의 아들이다. 1925년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와 서울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8세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입학,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5년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를 마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일을 보았다. 1913년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 부임, 1936년 이 학교 교장이 되고, 계성학교(啓星學校)의 교장직도 겸임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에는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월간잡지 『가톨릭청년(Catholic靑年)』의 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 동안에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교부들의 신앙』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수립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같은 해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 등과 한국수석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1951년로마 교황청비오12세로부터 성신베스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경기도 포천가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정치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점과 4·19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에서 불구하고 민주적 선거절차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데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리더십 측면에서 장면은 나름대로의 근대화에 대한 이상과 정책을 갖추고 있었지만, 체제 정당화와 정권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안목과 기술 그리고 엘리트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그의 이러한 단점이 5·16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도 평가된다.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8세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입학,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5년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를 마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일을 보았다. 1913년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 부임, 1936년 이 학교 교장이 되고, 계성학교(啓星學校)의 교장직도 겸임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에는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월간잡지 『가톨릭청년(Catholic靑年)』의 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 동안에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교부들의 신앙』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수립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같은 해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 등과 한국수석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1951년로마 교황청비오12세로부터 성신베스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경기도 포천가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정치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점과 4·19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에서 불구하고 민주적 선거절차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데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리더십 측면에서 장면은 나름대로의 근대화에 대한 이상과 정책을 갖추고 있었지만, 체제 정당화와 정권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안목과 기술 그리고 엘리트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그의 이러한 단점이 5·16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도 평가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