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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자미상

作者不详

Unknown

  • 진찬도 8폭연결병풍

進饌圖 八幅連結屛風

Eight-Fold Folding Screen with Feast for the King

견본채색
Ink and Color on Silk

147×412㎝

병풍

추정가

  • KRW  1,500,000 ~ 4,000,000
  • USD   1,250 ~ 3,320
  • JPY     134,000 ~ 356,000

낙찰가

KRW 5,000,000

작품 상세 설명

궁중의 주요한 왕실인사의 생신 때 잔치를 여는 일은 조선 초 이래로 지속된 전통이었다. 궁중의 잔치는 국왕, 왕비, 왕대비, 왕세자 등 행사 주인공의 위상에 맞게 각기 예에 따라 규모와 예식을 조절하면서 진행되었다. 왕을 위한 연회는 진연이라 하였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를 위한 잔치는 보통 진찬이라고 하였다. 병풍의 제목을 진찬도(進饌圖)라고 한 것은 왕대비와 왕비를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인정전 안 중앙에는 용평상과 용교의, 답장이 설치되었고, 그 아래에 금관조복을 입은 대신들이 어좌를 향해 조아리고 앉아 있다. 인정전 밖 뜰에는 문무관이 공복을 입고 인정전을 향해 정좌하고 있다. 어좌에 왕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왕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궁중회화에서는 왕, 왕비, 왕세자 등 중요한 인물은 그리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대신 어좌(御座)나 교의(交椅), 어마(御馬) 등을 그리면 그 자리에 해당 인사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 장면은 장중하고 엄숙한 구성이며, 모든 인물은 움직임이 없다. 여러 깃발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 그려졌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다. 좌우대칭적인 구성, 정적인 표현, 화려한 진채 효과는 장면의 엄숙함과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택된 방식인 것이다. 19세기의 진찬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표현방식을 지켜 나갔다. 《무신진찬도》병풍은 이후 19세기에 자주 제작된 진찬도병의 전형이 되었다. 19세기는 세도정치가 지속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 동안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수많은 진찬(進饌), 진연(進宴), 진작(進爵) 행사가 치러졌다.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여 빈번하게 진행된 궁중의 행사들은 화려하고 기념비적이었지만 국력을 쇠잔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진찬, 진연, 진하도 병풍들은 지금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대작 그림들을 보면서 느끼는 아이러니 또한 역사적 교훈이 되고 있다.